오늘은 속리산정이품송공원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속리산 정이품송공원은 정이품송 소나무 옆 개울
건너편에 만들어진 공원인데요.
거기에는 많은 분들의 동상이 만들어져 있어요.
그 동상들은 거기에 왜 만들어져 있는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에 대해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를
해보도록 할게요.
제 이야기는 법주사와 복천암에 계시는 스님들께서
절에서 전해내려오던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는
사실을 우선 말씀 드릴게요.
속리산정이품송공원의 주인공이기도 하신 분이죠.
영화 "나라말싸미"
를 통해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진 분
바로 신미대사입니다.
이분은 훈민정음을 만들당시
훈민정음 만드는 일을 총괄 감독을 하셨다고 하네요.
세종대왕께서 우리글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했는데 집현전학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생들은 쌍심지를 켜고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글을 만드는 것은 언어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때 만난 사람이 바로 산스크리트어의 대가였던
신미대사라고 합니다.
산스크리트어는 인도의 고전어로 힌두교 대승불교 자이나교 경전의 언어이자 인도아리아제어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라고 합니다.
그래도 훈민정음을 만든이는 세종대왕으로 보는것이
맞을 듯 합니다.
왕으로서 여러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글을 만드는 것을 결정하고 여러 아들과 딸과
함께 한글을 만들었으니까요.
속리산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대왕과 신미대사가 주도적으로
만들었으며 여기에는 세종의 아들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첫째아들 문종과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등이 조력을 했다고 합니다.
세종의 아들들중 훈민정음 창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이는 바로 세종의 큰 아들 문종이라고 합니다.
문종은 아버지인 세종을 닮아서 학문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한글창제에도 깊이 관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측우기등도 바로 문종이 만든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세종이 죽기 전 부터 나라일을 맡아서 했다고 해요.
결국은 일을 많이 하다보니 건강이 좋지 않아
단종이 폐위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으니까요.
속리산정이품송공원에는 있지만
영화 나라말싸미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데요.
바로 세종의 큰딸이며 문종의 누이동생 세조의 누나
정의공주입니다.
정의공주 또한 머리가 명석하기로 유명했다고해요.
당시 수원에 사는 안맹담이라는 자와 혼례를
치렀는데
"죽산안씨 대동보"
의 기록에는 훈민정음 창제에 힘을 썼다는
관련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이 변음토착(변음을 넣고 빼는것)에 대해
다 끝내지 못하여 여러대군들에게 풀게 하였으나
풀지 못하여 공주에게 내려보내 풀게 하였더니
공주가 곧 풀어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네요.
이 기록이 언제 쓰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또다른 기록은
보통 공주가 시집을 가게되면 궁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는데 유독 정의공주는 지금은 멀지 않지만
그 당시에는 먼 곳이었던 수원에서 한양의 궁에
몇차레나 방문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그당시 한글창제의 비용중 많은 부분을
정의공주가 부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옵니다.
그러니까 한글창제는 남자들만이 한 것이 아니라
여자들도 함께 협력했기 때문에
훌륭한 우리글이 만들어 진것이 아닐까요?
속리산 정이품송공원에 있는 또다른 주인공
안평대군은 우리가 역사드라마를 통해서도 알고
있고 안견의 명작 '몽유도원도' 발문을 쓸 정도로
시화에도 능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한글 창제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합니다.
속리산 정이품송공원의 마지막 주인공
수양대군 즉 세조도 한글창제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 데요.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바로 신미대사의 호위를 책임졌었다고 합니다.
신미대사는 세종의 다른아들들과도 가깝게 지내기는
했지만 늘 함께 다녔던 수양대군을 가장 가까이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일까요
자기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를 빼았은 뒤
신미대사를 더욱 더 따르고 의지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머나먼 이곳 충청도 보은의 속리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복천암(당시복천사)까지 행차를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전해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 아닐까요?
따지기 이전에 조선은 숭유억불의 나라였잖아요.
그런데 훈민정음을 만든다음 훈민정음으로 만든
첫번째 작품이 역사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듯이
용비어천가와 석보상절이잖아요.
새로운 글을 만들고 처음 그 글로 만든것이
이씨왕조의 탄생을 찬양하는 노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데 숭유억불의 나라 조선에서
석가를 찬양하는 것을 새로만든 글로
처음 지은것이 석가를 찬양하는것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세종때 뿐 아니라 문종과 세조때 까지도 간경도감을
설치하고 불경을 훈민정음으로 만드는 일을
한 사실도 역사적 사실이거든요.
" 그리고 또하나의 중요한 사실 "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중
상당수가 법당의 부처님 복장품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 놀랍지 않은가요?
몇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상주본도 그 출처는
바로 절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요.
이외에도 속리산정이품송공원에는 신미대사의
부모님과 동생 그리고 신미대사의 스승과 제자등도
동상으로 만들어서 세워 놓았어요.
그 부분들은 조금 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제 블로그에는 그 부분은 적지 않았어요.
확인하시는 방법으로는 한번 들러보시면 될 겁니다.
조금 있으면 이제 본격적인 단풍철이 되는데요.
속리산 단풍 아름답기로 유명하지요.
속리산 들러서 단풍 구경하실때 덤으로 한번 씩 들러보시면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접해 보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