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가 살고 있는 청주출신의 예술가 한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20여년전 사상적 혼란의 시기에 알게 된 분으로
저에게는 나름 이정표를 세울수 있게 지표가 되어준 분입니다.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 볼 수 있는 청동미륵대불인데요.
이 불상의 모태가 되는 작품 보신적 있으신가요.
나이가 좀 있으신 분들은 보신분들도 있을텐데요.
1987년에 해체철거되었다고 하는 법주사미륵대불입니다.
1940년에 완성을 보지는 못하고 김복진 선생님은 돌아가셨다고 하는데요.
이 불상을 설계하고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참고로 위 사진들은 청주시립미술관 1층에 있는
청주시립미술관 작가 아카이브에 있는 사진을
재촬영해서 사용했습니다.
청주시립미술관은 개관기념 전시회로 정관김복진을
비롯한 청주출신 3인의 예술가 전시회를 한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전시회를 본 적이 있는데 사진은 남아있지 않아요.
김복진 선생은 1901년 지금의 청주시 남이면 팔봉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버지가 1911년 황간군수로 발령을 받았서 영동보통학교를 다니다
자퇴를 했다가 다시 졸업을 하게 됩니다.
1916년 서울로 올라가 서울배재고등보통학교입학
그곳에서 부터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기시작하여
이후 독립신문제작에 참여하기도 하고 3.1운동에도참여하는등
그 당시 뜨거운피를 가진 조선청년들이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열심히 하게 됩니다.
1920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조각수업을 받지만
이당시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과 조각에 대한 열정사이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열정을 더욱 더 불살랐던 것 같습니다.
당시 사진으로 남아있는 김복진 선생의 모습은
현대에도 어울릴 만한 세련미를 갖추고 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1924년 '여인입상'이라는 작품으로
제5회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기는 하지만
1925년 도쿄미술대학을 졸업한 이후에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창립을 주도하고
신간회활동을 하는등 독립운동에 열정을 불태웠지요.
위의 작품을 보면 그당시 여인의 두상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이지요.
김복진 선생이 갖고 있던 생각과도 연결되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다가 1928년 일제에 의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되고
옥고를 치르면서 불교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됩니다.
옥중에서 '관음상'을 포함한 다수의 불상을 제작하게 되지요.
지금까지 김복진 선생의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은게 아쉽지만요.
그리고 이시절 옥고를 치르면서 몸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져서 출소를 하게 됩니다.
1934년 두번째 수감이 되면서 몸이 더욱 안좋아져서
독립운동에 대한 직접적인 활동들은
줄이고 조각과 예술활동에 전념을 하게 됩니다.
1938년 작품 백화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조선여인의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것 같아요.
저고리와 치마의 주름 또한 매우 사실적이며 세밀하게 표현 된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또한 소실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고 사진으로만 감상할 수 있다고 하네요.
이 작품은 1940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받은 작품입니다.
사진으로 보았을때 이 작품은 신체의 느낌을 잘 표현한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 보았을때도 소년의 근육과 피부가 자연스럽게 느껴지거든요.
조선미술전람회는 지금의 국전이고 특선이 바로 조선총독상이라고 하는데
이상을 받은 그해에 정관 김복진선생은 타계를 합니다.
청주시립미술관 작가 아카이브에 복원 전시되어있는
정관 김복진 선생의 백화와 속리산 미륵대불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 근대미술의 토대를 만들었다고 평가받는
청주출신 미술가의 작품인거죠.
모조작품은 청주의 정창훈작가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어딘가
조금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1940년 작품 소년에 대한 평을 한 글입니다.
오른쪽은 정관 김복진선생에 대한 평을 한 글입니다.
둘 다 누구의 글인가 하면 김복진선생의 동생 팔봉 김기진의 글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팔봉 김기진은 형이 죽은후
친일파로 변신을 해서 해방이후
이승만,박정희정권에서 문화계의 거물로 대접받다 죽었다고 해요.
형과는 조금 대조되는 사람의 글이라 씁쓸하기는 합니다.
오늘은 내가 살고 있는 청주 출신 예술가 정관 김복진 선생을 만나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