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맹씨행단에서 청백리 맹사성의 숨결을 느껴봅니다.
아산맹씨행단은 아산시 배방읍에 위치해 있습니다.
맹씨행단은 맹사성고택, 구괴정, 쌍행수, 세덕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중 가장 하이라이트는 바로 맹사성 고택이라 말 할 수 있겠죠.
맹사성고택은 1330년(충숙왕17년)에 지어진 고려시대의 민가건물입니다.
현존하는 전통건축물중 민가로서는 연혁이나 구조적인 기법등이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고려말 최영장군이 이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맹사성은 최영장군의 손녀사위로 이집을 맹사성이 이어받은 것이랍니다.
집을 보면 소박하고 아담한 느낌을 갖습니다.
그 이유는 집을 지은 양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가운데 기둥을 제외하면
왼쪽의 사진모습에서 알수 있듯이 기둥위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은 민도리집임을 알 수 있어요.
가운데 기둥부분만 소의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 쇠서를 하나 만들어 놓은 초익공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엿볼수 있는 우리나라 대표 건축물로는 수덕사 대웅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등이 있는데
그러한 건물들의 기둥위에는 포를 얹은 주심포양식으로 지어졌거든요.
사찰의 법당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당시 최고의 명문집안으로서 최영의 집이 이렇게 소박하다는 것은
우리가 알 듯이 황금을 보기를 돌 같이 했다는 말이 허황된 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해 주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사성고택의 특징중 하나는 조선시대에는 사용하지 않은 평면도 모습을
한자어의 공자를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는 유교를 사회질서의 기본으로 삼아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분명히 하였기 때문에
한자어의 공자를 선비나 귀족의 집 평면모형으로 삼는 것은 금기시 되었거든요.
그런데 고려시대에 지어진 집이기도 하거니와 한자어의 공자와 공부를 하는 공자가 발음이 같아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한자어공자의 평면구조를 건축하였다고 합니다.
맹사성이 심었다고 알려진 두그루의 은행나무라고 해서 쌍행수라고 합니다.
맹사성은 손수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공자가 은행나무아래에 단을 쌓고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유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맹씨행단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은행나무에서 만들어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산맹씨행단 입구의 모습입니다.
맹씨행단을 설명하는 글과 맹씨행단을 들어가는 출입문의 모습입니다.
제가 20여년전에 들렀을때는 저 출입문이 낡아서 무너질 듯 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보수가 잘 되어서 말끔해 보입니다.
세덕사의 모습입니다.
세덕사는 맹사성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맹사성을 모신 사당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두문동 72현이라는 말을 들어보신적이 있나요?
고려가 멸망하고 고려 태학에 있던 72명의 지식인들은
조선에는 출사하지 않겠다고 두문동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자성어인
두 문 불 출
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바로 맹사성의 조부와 부친도 두문동72현과 함께 두문동에 들어간 인물들이라고 하네요.그러다 두문동에서 상의끝에 맹사성에게는 출사를 허락하여 조선에 출사를 하였고 능력을 인정받아 명재상이 되었다고 합니다.바로 맹사성이 청백리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조상들의 정신에 있다고 합니다.조선왕조에 출사한 유일한 이유가 바로 백성들을 위한 결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만 바라보고 일을 했기 때문에 청백리로 살았다는 것이죠.
아산맹씨행단 옆에는 고불맹사성기념관이 있습니다.
그위 기념관 공원에 맹사성동상이 있구요.
맹사성동상 아래에는 아산맹씨행당과 관련된 여러가지 설명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꼭 알아야 할 것들을 설명하고 있으니까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아산맹씨행단옆에 있는 고불맹사성기념관의 모습입니다.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문이 닫혀진 상황이구요.
코로나가 끝나면 아마도 기념관을 정상으로 관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불맹사성 야외공원에 세워진 맹사성의 동상입니다.
맹사성은 소를타고 피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소는 검은소로 하루는 고개를 오르는데 아이들이 검은소를 괴롭히고 있어서 아무리 짐승이라도 생명을
괴롭혀서는 안된다고 타이른 다음 소의 주인을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아서 소를 데리고와 보살폈으며
소도 맹사성을 잘 따라 맹사성은 평생 가마대신 검은소를 탔다고 하네요.
맹사성이 세상을 떠난 후 소는 사흘을 먹지않고 울면서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소의 충심에 감복하여 맹사성의 묘아래 묻어주고 흑기총이라 불렀다 합니다.
또한 맹사성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태종과 세종때 음악을 정비하고 악인을 교육하엿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연주하엿는데
집 멀리에서도 피리소리가 들리면 맹사성이 집에 있음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상의 모습이 소를 타고 피리를 부는 모습으로 디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산맹씨행단을 동영상으로 돌아보았습니다.
맹사성고택,세덕사, 은행나무등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